[장정석 칼럼] 교육이 왔던 길, 가야 할 길

  • 입력 2026-08-24 20:34:23
인공지능 시대에 교육이 할 일
제안된 답 평가할 역량 키워야
인재를 지켜낸 사회 번영했듯
육성·유지에 경제 활력 결정돼

장정석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연구자문위원 얼마 전 대학교수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 “인공지능이 답을 다 주는데, 굳이 교육이 필요한가요.”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문득 역사 속 몇 장면이 떠올랐다. 인재를 지킨 사회와 상실한 사회의 이야기이다.

16세기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은을 채굴하여 도입하면서 유럽 최강국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네덜란드 반란, 영국과의 전쟁 등 끝없는 전쟁으로 국고가 소진되었고 기독교 단일 신앙을 앞세운 종교 정책은 안에 있던 인재를 밖으로 밀어냈다.

1492년 유대인 추방과 1609년 무슬림에서 개종한 모리스코 추방으로 상인과 장인, 농민이 대거 이탈했다. 은은 계속 유입되었지만, 그 부를 관리할 사람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금융과 무역에서 유럽을 앞서가던 나라였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총독 빌럼3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면서 네덜란드의 금융 기법과 인재가 함께 건너갔다. 몇 해 뒤 영란은행이 설립되고 국채 시장이 자리를 잡은 배경에는 이 인재의 이동이 있었다.

프랑스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신교를 허용한 낭트칙령이 1685년 폐지되자 견직과 시계, 은세공 기술을 지닌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 약 20만명이 국외로 빠져나갔다. 그중 상당수가 영국에 정착해 견직물 산업의 기반을 놓았고, 프랑스가 내어준 기술과 자본은 그대로 영국의 자산이 되었다.

이 사례들이 시사하는 바는 같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인재를 상실한 사회는 경제활력을 쉽게 회복하기 어려웠다. 국력의 크기는 그 사회가 품고 있는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다만 받아들이는 쪽에도 조건은 있었다. 위그노의 기술이나 네덜란드의 금융 기법이 자산이 되려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역량이 받아들이는 사회에도 있어야 했다.

이를 알아보는 눈도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역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역사적 사례처럼 다른 사회로부터 유출된 인재를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지만, 그 인재를 식별하고 자체적으로 양성하는 길은 교육뿐이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다 보면 어떤 사실에 대한 이해는 점점 더 깊어진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제대로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옛말도 같은 이치이다.

다시 처음 교수들에게 던졌던 질문으로 이어가 보자. 학생이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답을 내놓았을 때, 우리는 그 결과물의 어디까지를 실제 실력으로 인정해야 할까.

인공지능이 알려준 답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그 답을 기준에 따라 평가한 뒤 활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행위다. 이 기준을 세우는 역량이 교육이 다루어야 하는 영역이다.

이때 답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힘은 도메인 지식, 즉 그 분야에 대해 이미 갖추고 있는 배경지식에서 나온다. 배경지식이 없으면 인공지능이 제시한 답이 그럴듯한지 어색한지조차 판별할 수 없다.

이 지식은 인공지능이 얼마나 확산되든 상관없이 암기하고 반복하는 예전 방식으로라도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부분이다. 이 원리는 첨단 기술이 도입된 산업 현장에서도 예외 없이 확인되는 사실이다.

경기 지역의 제조업 현장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설비는 최신이었지만, 예상 밖의 문제가 생겼을 때 판단하고 해결하는 역량은 오랜 경험을 가진 숙련 인력에게서 나왔다. 이 기준을 실제로 적용하는 일이 사람의 몫이라는 사실을 그곳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역량을 갖춘 인력의 유무가 지역 경제의 회복탄력성을 좌우했다.

인공지능 시대에 교육이 할 일은 제안된 답을 평가할 기준을 세우고 판단력을 기르는 데 있다. 그 판단력을 필요한 곳에 활용하도록 하는 일도 교육의 몫이다. 인재를 지켜낸 사회가 번영했던 것처럼, 이 기준을 갖춘 사람을 얼마나 육성하고 유지하느냐가 경제의 활력을 결정할 것이다.

/장정석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연구자문위원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