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10월 31일 임홍재 인천시장은 스물일곱 젊은 이경성에게 인천시립박물관장 발령장을 주었다. 그런데 정작 박물관도, 직원도, 예산도 없었다. 당시 미군정관 홈펠 중위가 아이디어를 냈는데, 임홍재 시장이 이를 받아들여 관장 발령부터 낸 거였다. 이경성 관장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해야 했다. 유물도 이 관장이 빌리거나, 얻거나, 우연한 기회에 가져와 마련했다. 우연히 가져온 유물이 아직도 박물관 앞의 중국 종 세 구다. 그 종들이 있던 곳이 부평의 조병창이었다. 이경성 관장이 자서전 형식으로 쓴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을 보고서 부평조병창과 박물관의 중국 종 이야기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1945년 10월 어느 날 평양 미림동 군인촌의 병기 제조소에서 일하던 일본인들이 평양치안대로 끌려갔다. 일본인들이 패전 후 돈이 궁해지자 물건을 팔아가며 생활비를 마련했는데 그중에 조미료인 ‘아지노모토(味の素)’가 문제였다. 조선인들이 그 조미료를 사치품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학자 이연식의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에 나오는데, 작가는 당시 인천육군조병창 평양제조소 병원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소개했다. 이를 보고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 부설 기구가 평양에도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1953년 6월 18일 0시, 전국의 수용소에 흩어져 있던 반공포로들이 일제히 석방됐다. 그런데 인천 부평의 미군 기지 반공포로들은 그대로 갇혀 있었다. 이날 밤 10시 20분 포로들은 담요를 철조망에 얹고 탈출을 감행했다. 미군은 탈출하는 포로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1천500여 명의 포로 중 50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탈출에 성공한 인원은 300여 명. 영화에나 나올 법한 전쟁 포로 대규모 탈출과 사살이 부평 미군 기지에서 빚어졌다는 얘기를 박종은이라는 이가 쓴 ‘포로수용소 생활 1200일 실화-PW’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일제강점기 인천 부평의 육군조병창은 해방 이후 미군 기지로 전환되었다. 그 두 시설의 세부 사항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아직도 우리 땅으로 온전히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 공간과 시간 모두에서 빈칸이 너무나 많다. 지난 24일자 경인일보에 ‘인천조병창 아카이브, 빈칸을 채우다’라는 기획 기사 첫 회 분이 실렸다. 처음 듣는 얘기가 많았다. 앞으로 10여 차례의 내용이 기다려진다.
/정진오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