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평양~서울 기착지였다"… 옛길 복원사업 필요성 수면위로

  • 윤설아 기자
  • 발행일 2018-10-01
19C말 3곳 앞글자 딴 '평경인상회'
김란사 애국지사 가족이 운영 증언
김용택씨 "인천은 양쪽 상권 중심지"

육로로 1주일 걸릴때 뱃길 3일 충분
의료선교사 '좋은 여행길' 기록도


인천이 평양과 서울을 잇는 중간 기착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양에서 서울까지, 또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육로로 가기 위해서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만 해도 1주일씩이나 걸렸다. 인천을 거치는 뱃길을 통하면 절반이 줄어 3일이면 충분했다.

평양~경성(서울)~인천을 잇는다는 의미의 '평경인상회'라는 회사까지 있었다고 한다.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 애국지사 집안에서 '평경인상회'를 운영했다는 증언을 경인일보가 확보했다. 평양~인천~서울을 잇는 옛길 복원사업이 필요해 보인다.

평양~인천~서울의 길은 19세기 후반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닥터 셔우드 홀'의 '조선회상'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는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육로로만 편도로 1주일이 걸렸는데, 배편을 이용하면 기선 운항은 불규칙했지만 시간은 절반으로 절약할 수 있었다고 나와 있다.

1898년 4월 29일 서울을 떠나 제물포에서 배로 갈아타고 항해해 5월 1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3일이면 됐다. 이 때문에 홀 일가는 가족과 함께 이동할 때는 배편을 이용했다.

황해남도 해주까지 가는 길은 경치가 좋아 여행길로 삼기도 했다.

경치가 좋은 서해안의 뱃길을 따라 해주에 가기로 한 셔우드 홀 일행은 "날씨가 좋아서 충분히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배는 험한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펼쳐져 있는 섬 사이를 들락날락하며 항해했다"고 전했다.

인천은 교역·물류에 있어서도 큰 상권이 형성된 평양과 서울의 중심지였다.

2014년 한양대학교 석사논문 '개항기 진남포의 무역구조와 상권의 변화(1897~1910)'에 따르면 평양은 조선에서 한양 다음가는 상업 중심지였는데 1897년 평양을 배후지로 한 진남포가 개항한 이후에도 한동안 평안도의 무역은 인천에 의존했다. 1903년 이전까지 진남포에 제일은행 인천지점 진남포출장소가 있을 정도였다.

19세기 말에는 '평경인상회'라는 무역회사까지 등장했다.

김란사 지사의 조카 손자인 김용택 '김란사 애국지사 기념사업회장'은 최근 경인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란사) 할머니와 가족이 '평경인상회'를 운영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평양의 평, 경성(서울)의 경, 인천의 인, 앞글자를 따서 만든 회사인데, 지금으로 따지면 무역회사나 상사 역할을 했다. 주로 비단, 면직물을 팔았다"며 "평양과 서울, 충청지역까지 오갔는데 그 중심지가 인천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 후손들이 모두 인천에 모여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천이 평양과 서울의 배후지이자 평양과 서울 상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1872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란사 애국지사는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개항기 인천에서 사법·외교 기능을 했던 인천 감리서의 하상기 별감을 남편으로 맞으면서 인천과 연을 맺었다.

우리나라 최초 미국 자비 유학생이자 여성 문학사로, 이화학당 총교사 사감을 맡아 유관순 열사를 가르쳤으며, 전국을 돌며 자주정신과 여성인권 향상을 위한 교육을 펼쳤다. 1919년 파리국제강화회의 한국대표로 비밀 파송 중 북경에서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의 여성 독립운동가 김란사 애국지사에 대한 남북 학계의 공동 연구와 더불어 김란사 지사가 오갔던 평양~인천~서울 간 옛길이 새롭게 되살아 날 수 있을지 관심이다.

김용택 회장은 "김란사 지사는 평양에서 태어나 서울, 인천에서 살았고, 교역은 물론 부인 계몽교육, 독립운동, 사회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라며 "남북이 함께 김란사 지사의 길과 족적을 연구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